어제는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을 물어서 선생에게 깊은 사과의 말을 전하고 왔다. 하지만 선생의 반응은 "뭘요. 충분히 생길 수 있었던 사건이었고, 아직 아이가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뿐입니다."였다. 진심 감사했다.
필리핀에 살면서 사람들이 묻는 게 "거긴 항상 덥지?"이다. 뭐 물론 덥다. 하지만 "필리핀에도 4계절이 있다"라고 대답을 하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본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처럼...
필리핀의 4계절은 이렇다. 11월 부터 대략 2월까지는 '건기' 즉 여름이다. 비도 오지 않는 여름인데 해질 무렵이 되면 조금 시원해지는 '가을' 같은 날씨다. 2월이 지나면 대략 5월까지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시작하는데 이때야 말로 '정말 더운 여름'이다. 5~6월쯤 되면 이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두 번은 비가 내리는 우기, ‘비가 내리는 여름’의 시작이다. 그리고 11월이 되면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다시 건기가 돌아온다.
'어? 그렇게 보면 계절이 3개인대??' 라고 생각하겠지만 숨어 있는 계절이 있다. 바로 실내에 들어가면 느낄 수 있는 '에어컨이 켜져 있는 여름'이 있다.
필리핀의 실내는 엄청 춥다. 적정 온도따위는 없다. 무조건 '최하 온도에 최대 풍량'이 이 나라의 에어컨 켜는 방법이다.
아이의 학교도 마찬가지다. 교실은 엄청 춥고 아이들이 나가서 노는 놀이터는 엄청 덥다. 그래서인지 아이가 감기에 걸렸다. 목이 아파서 침을 제대로 못 삼키는 게 보인다. 입에 침을 머금고 말을 하니 발음도 샌다. 아이는 익숙지 않은 학교가 무서웠고, 1대 1로 돌봐주는 선생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불안했던 모양이다. 게다가 목도 아프고 컨디션이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 사달이 났던 거였다. 이해해 주는 선생이 고마웠고 아침에 아이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걸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나 자신을 자책했다.
집에 오는 길에 아이의 컨디션은 계속 좋지 않았다. 내가 말을 걸면 짜증이 나서 칭얼거렸고 그 좋아하는 '스페인어로 숫자 세기'도 하지 않았다.
육아를 하면서 아이가 점점 달라지고 변해가고 발전해 가는 모습을 보는건 상당한 즐거움이다. "얘가 이런 말도 하네?","얘 움직이는 거 봐!!" 육아의 가장 큰 보상일 수도 있다.
자폐아를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내가 자폐아를 키운다는 무게에 짖눌려서 그 작은 행복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 '육아의 우울함의 늪'에 빠져서 나와 아이 모두 불행하기만 하게 된다. 이건 어떤 육아도 마찬가지다. 그저 자폐아가 부리는 땡깡은 일반 아이들도 다 부리는 땡깡을 조금 더 부리는 거라고 생각하면 좀 편해진다. 물론 자폐아의 경우 정말 우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Tantrum을 보이기도 하고 아무리 설득해도 되지 않는 경우들도 있지만 결국에는 진정시킬 수 있다. 다만 부모가 조금 더 많이, 아니 아주 많이 노력을 해야 하긴 하지만....
어젯밤에 아픈 목에 스프레이로 된 약을 뿌려줬다. 내가 맛을 봤는데 그냥 약맛이다. 이건 자폐아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가 좋아 할리 절대 없다. 아이는 "싫어"를 연발했고, 약을 뿌리는데 한 시간 정도 실랑이를 한 거 같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을 해야 하는 건 한 시간을 실랑이를 한 게 아니라 자기 의사 표현을 했다는 거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싫어, 안 뿌릴래!!"라고 이야기하는 아들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게 싫다고 나한테 말을 하네?'라는 생각이 들면서 나 자신에게도 왠지 모를 뿌듯함이 느껴진다. 예전에는 아침에 깨우면 그저 칭얼거리기만 했다면 오늘 아침에는 "졸려요. 아빠도 자요"라고 문장으로 말을 했다.
아빠를 쳐다본다. 그래 사람을 쳐다보지 않던 아이가 아빠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간식으로 절대적으로 한 가지 과자만 먹던 아이가 다른 과자도 한 번씩 도전해 보기도 한다. 아이스크림을 먹어 보기도 했고, 어제는 "요거트. 맛있는 딸기 요거트" 라면서 요플레 한통을 먹었다.
킥보드를 2년 동안 가르쳤지만 그걸 혼자서 밀고 가기 시작한 걸 본 순간 난 정말 세상을 다 갖은 느낌이었다. 내가 했던 노력들의 모든 보상을 받은 것 같았다.
기저귀는 아직 못 뗐지만 화장실 가고 싶다고 아빠한테 말을 할 때도 있고 혼자 쪼르륵 화장실로 뛰어가는 거 보면 '그래 완벽하진 않지만 자기도 뭔가 하려고 노력하는구나.' 하면서 당장 달려가서 뽀뽀해 주고 싶어 진다.
작은 기쁨 하나를 잊는 순간 내 삶은 엉망이 된다. 실제로 나도 육아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온 적이 있었다. 모든 것에 분노가 차 있게 되고 아이에게 화내거나 소리를 지르기 일쑤였다.
뭔가 하나씩 변해가고 조금씩 더 잘할 수 있게 되는 거.... 그게 너무 느려서 포기하고 싶어 지더라도 여태까지 변해 온 것들을 하나씩 생각해 보면 갈길의 끝은 안 보이지만 조금씩이라도 전진할 힘이 생긴다. 왜냐하면 부모는 위대하니까....
난 완벽하지 않을진 몰라도 최선을 다하는 좋은 부모야 라고 본인을 칭찬해 주는 하루하루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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